고종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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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1863년 철종의 후사 없이 죽음으로 인해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초기에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거쳐 친정을 시작했으나, 개화 정책 추진과정에서 외세의 침략,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혼란을 겪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했지만, 열강의 각축 속에서 국권을 잃고 강제 퇴위당했다. 1919년 사망했으며,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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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대한제국)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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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고종 |
한자 표기 | 高宗 |
휘 | 이명복 (李命福) → 이희 (李㷩) |
다른 이름 | 이재황 (李載晃) |
자 | 명부 (明夫) → 성림 (聖臨) |
묘호 | 고종 (高宗) |
시호 |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
존호 |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 |
출생일 | 1852년 9월 8일 |
출생지 | 운현궁, 한성부, 조선 |
사망일 | 1919년 1월 21일 |
사망지 | 덕수궁, 경성부, 한국 (일본 제국 통치) |
매장지 | 홍유릉, 남양주시, 대한민국 |
종교 | 한국 유교 (성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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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
아버지 | 흥선대원군 (생부), 문조 (양부) |
어머니 | 순목부대부인 (생모), 신정왕후 (양모) |
배우자 | 명성황후 (1866년 결혼, 1895년 사망) |
자녀 |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외 다수 |
조선 국왕 (재위: 1864년 ~ 1897년) | |
즉위일 | 1864년 1월 16일 |
즉위 장소 | 창덕궁 인정문 |
전임 | 철종 |
후임 | 왕위 폐지 (대한제국 수립) |
섭정 | 신정왕후 (1864년 ~ 1866년) 흥선대원군 (1864년 ~ 1873년, 실질적) 명성황후 (1873년 ~ 1894년, 실질적) |
대한제국 황제 (재위: 1897년 ~ 1907년) | |
즉위일 | 1897년 10월 13일 |
전임 | 새로운 직위 수립 |
후임 | 순종 |
재위 기간 |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 (9년) |
즉위식 | 환구단 |
연호 | 개국 (1894년 ~ 1895년), 건양 (1896년 ~ 1897년), 광무 (1897년 ~ 1907년) |
총리 | 심순택 김병시 윤용선 조병세 이근명 조병식 (서리) 박제순 (서리) 이완용 (서리) 민영규 조병호 |
태상황제 (재위: 1907년 ~ 1910년) | |
재위 기간 | 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 |
후임 | 왕조 폐지 (한일 병합 조약) |
덕수궁 이태왕 (재위: 1910년 ~ 1919년) | |
총리대신 (1895년-1896년) | 김홍집 박정양 김홍집 김병시 윤용선 |
의정대신 (1896년-1897년) | 심순택 김병시 |
내각총리대신 (1907년-1910년) | 이완용 박제순 이완용 |
영의정 | 이경재 김병학 정원용 김병학 홍순목 이유원 이최응 서당보 홍순목 김병국 심순택 김병시 |
2. 생애
1863년 12월 8일(양력 1864년 1월 13일),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2] 당시 고종의 나이는 겨우 열두 살이었으므로,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이를 보좌하였다. 1866년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6]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특정 가문들을 권력에서 배제하고, 남인과 북인 등 다양한 세력을 등용하였다. 조선 후기 정치 기구였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정치와 군사 기능을 나누었다.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정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만력제의 사당인 만동묘도 철폐하였다.[4]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숨겨진 토지를 찾아내고, 사창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도왔다. 또한,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함으로써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국가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였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가 상승하고,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 징수, 양반 묘지림 벌목, 도성 통행세 징수, 백성 강제 노역 등으로 백성과 양반 모두의 반발을 샀다.
1866년 1월,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이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하고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박해하였다.(→병인박해)[4]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주민을 약탈하고 살육하자, 평양 지역민과 평안도 감사 박규수에 의해 선박이 불타고 선원들이 모두 살해되었다.[4] 1866년 9월,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했으나,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등이 격퇴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의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관련 유물들을 약탈하였다.(→병인양요)[4] 1868년에는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할 뻔한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이 발생하였다.[4] 1871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의 지휘 아래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연이어 공격하였는데,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전사하고 미군은 승전의 의미로 '수(帥)자기'를 탈취하였다.(→신미양요)[4] 이 시기 서양 제국과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고종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 의지를 천명하였다.
1873년 (고종 10년)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에 의한 척신 정치가 시작되었다.[6] 1875년 (고종 12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다.[7]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세계 정세에 발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고종은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여,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일본식 군제를 도입하여 교육받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행정기구 개혁에도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880년(고종 17년),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이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 황준셴이 쓴 외교서인 <조선책략>을 갖고 들어왔는데, 이 책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일본, 미국 3국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1882년 4월,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1882년 6월,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급료 문제로 임오군란이 발발하였다. 흥선대원군이 10년 만에 재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진압되고 톈진으로 압송되었다.[9][10]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제물포 조약)
1884년 12월 4일 김옥균과 박영효가 주축이 된 급진 개화파 등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12월 6일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갑신정변의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12]
1885년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려던 영국 군함 세 척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이들은 청나라의 중재로 1887년 철수하였다.[6] 1894년 4월, 동학농민운동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5월 31일 농민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조선 정부는 6월 1일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다. 6월 6일, 청나라 군대 1500명이 아산만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9년 전인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맺은 톈진조약에 따라, 이틀 후인 6월 8일, 일본 또한 인천항을 통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정부는 6월 11일 서둘러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청일 양국에 군대 철수를 요구하였다.[6]
일본은 조선의 철수 요구를 무시하고 7월 23일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이어서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 중심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6] 이 개혁은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 제출로 시작되었으나,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갑오개혁을 통해 역사 이래 지속된 신분제도가 형식적으로 폐지되었다.[15] 7월 25일 일본은 청나라에 국교 단절을 통보하고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6]
청일 전쟁의 결과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辽东半岛)와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1895년 8월 25일, 친러 성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는데, 조선 내 러시아 세력 확장을 견제하던 일본은 친러시아적 성향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하고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주한일본공사의 지휘 아래 1895년 10월 8일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를 습격, 명성황후를 살해했다.(→을미사변)[5]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을 시행,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했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유생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직후 고종은 을미 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지목, 이들과 법부대신 장박을 포함한 다섯 대신을 잡아 죽일 것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는 피살되었고 유길준, 장박,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사실상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였다.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과 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했으며,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에 추진토록 했다.
1897년 10월 13일, 고종은 새로 건설된 황궁우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6]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새로운 연호 광무를 선포하여 청나라에 대한 종주권이 끝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6] 같은 날, 순종을 황태자로 책봉했다.[21]
고종은 한국, 특히 군대의 근대화 필요성을 절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민영환은 군대 근대화를 담당할 러시아 교관들을 초빙했고, 고종은 그들의 업무에 만족했다. 1898년 3월 러시아 교관들이 떠나자 군무부가 업무를 인계하도록 명령했으며, 군무부 장관 이종건의 요청에 따라 1898년 4월 군사학교가 설립되었다.[29] 1898년 6월 29일, 고종은 육군과 해군을 모두 지휘하기 위해 자신을 대한제국군 대원수로, 황태자를 원수로 임명했다.[30] 1898년 7월 2일, 고종은 군대에 대한 전권을 장악했고,[29] 1899년 8월 1일에는 원수부를 설립하여,[31]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32] 1899년에는 여러 나라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많은 사관생도들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파견했으며, 군대를 계속 확장해 나갔다. 1900년 7월까지 진위대 병력은 1만 7천 명에 달했고, 1901년에는 제국 총 수입의 약 44%가 군사비로 사용되었다.[29]
고종은 여러 차례 암살 또는 퇴위 시도를 당했다. 1898년 7월, 육군대신 안경수가 고종의 퇴위를 시도했고,[6] 1900년 5월 28일 음모죄로 처형되었다.[26] 1898년 9월 12일, 김홍륙이 고종의 커피에 독을 타서 암살하려 했다.[27] 1904년에는 일본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이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황제로 세우려 했다.[28]
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국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했다.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은 한국 내에서 논란을 일으켜 한국 내 반일 감정을 고조시켰다. 고종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져 1896년 러시아-한국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를 동맹으로 삼고, 러시아 제국에 많은 사절을 파견했다.[6] 일부 유교 학자들과 농민들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60개가 넘는 의병을 조직했다. 이 의병들은 동학 농민 운동에 이어 다양한 한국 독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1900년 9월 27일 육군 참위 김규복, 노백린, 어담 등 19명에게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83]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한국의 황성(한양, 지금의 대한민국 서울)을 침탈할 것으로 예상하고, 1903년 8월 15일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58]
1904년 1월 23일 고종은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0일 고종에게 일왕의 친서를 바쳐 위협하고, 11월 15일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며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84]
1907년 4월,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와 호머 헐버트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하였다.[34] 이 사건을 두고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할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고종은 1907년 7월 19일,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포했다. 다음 날인 7월 20일, 고종과 순종 모두 참석하지 않은 채 퇴위식이 거행되었다.[34]
1907년(융희 원년) 7월 24일,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요하였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다. (대한제국 군대해산) 정미7조약 체결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정미의병)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였고,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 머물게 되었다. 1912년, 임병찬 등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왕정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68세로 사망했다.[38] 공식적인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였으나,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한성부 안국방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군 이하응과 부인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희'''(㷩), 초명은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이다. 호는 주연(珠淵)이다.[57]아버지 흥선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며,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지만,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은 민치구의 딸로, 고종 즉위 후 부대부인 봉작을 받았다. 훗날 고종의 비 명성황후 가문에 입적되어 양오라버니가 되는 민승호와, 임오군란 때 살해당하는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고종에게는 생모 여흥 민씨 소생의 동복형제인 이재면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서형인 이재선과 이복누이 1명이 있었다.
colspan="2" |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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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부 | 문조 익황제 文祖 翼皇帝 | 전주 | 1809년 - 1830년 | 순조 숙황제 純祖 肅皇帝 순원숙황후 김씨 純元肅皇后 金氏 | 조선의 추존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
법모 | 신정익황후 조씨 神貞翼皇后 趙氏 | 풍양 | 1808년 - 1890년 | 풍은부원군 조만영 豊恩府院君 趙萬永 덕안부부인 송씨 德安府夫人 宋氏 | 효유왕대비 孝裕王大妃 효유대왕대비 孝裕大王大妃 조선의 추존 왕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
부 | -- | 전주 | 1820년 - 1898년 | 남연군 南延君[93] 군부인 민씨 驪興 閔氏 | 흥선대원왕 獻懿大院王 |
모 | 순목대원비 민씨 純穆大院妃 閔氏 | 여흥 | 1818년 - 1898년 | 민치구 閔致久 전주 이씨 全州 | 여흥부대부인 驪興府大夫人 |
2. 2. 왕위 계승
1863년(철종 14년) 12월 8일(양력 1864년 1월 13일),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2] 당시 고종의 나이는 겨우 열두 살이었으므로,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보좌하였다. 1866년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6]2. 3. 흥선대원군의 섭정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특정 가문들을 권력에서 배제하고, 남인과 북인 등 다양한 세력을 등용하였다. 조선 후기 정치 기구였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정치와 군사 기능을 나누었다.붕당의 근거지로서 오랫동안 면세 혜택을 누리며 폐단을 일으키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정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만력제의 사당인 만동묘도 철폐하였다.[4]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숨겨진 토지를 찾아내고, 사창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도왔다. 또한,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함으로써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국가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였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가 상승하고,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 징수, 양반 묘지림 벌목, 도성 통행세 징수, 백성 강제 노역 등으로 백성과 양반 모두의 반발을 샀다.
2. 3. 1. 외세의 침략
1866년 1월,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이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하고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박해하였다.(→병인박해)[4]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주민을 약탈하고 살육하자, 평양 지역민과 평안도 감사 박규수에 의해 선박이 불타고 선원들이 모두 살해되었다.[4] 1866년 9월,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했으나,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등이 격퇴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의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관련 유물들을 약탈하였다.(→병인양요)[4] 1868년에는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할 뻔한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이 발생하였다.[4] 1871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의 지휘 아래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연이어 공격하였는데,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전사하고 미군은 승전의 의미로 '수(帥)자기'를 탈취하였다.(→신미양요)[4] 이 시기 서양 제국과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고종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 의지를 천명하였다.2. 4. 친정 기간
1863년 12월 13일, 고종은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2] 당시 고종의 나이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신정왕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을 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의 섭정을 보좌하였다. 1866년 왕후가 섭정을 폐지하자 고종의 통치가 시작되었다.[6] 같은 해 3월 6일, 민치록의 딸인 민씨가 왕비로 간택되었다.[3] 흥선대원군은 섭정 권한이 없었지만, 불법적으로 섭정을 계속하였다.[6]1860년대 중반, 흥선대원군은 쇄국주의를 지지하고 국내외 천주교 박해를 주도했는데, 이는 1866년 프랑스와 1871년 미국의 조선 원정으로 이어졌다. 흥선대원군 통치 초기에는 왕권의 중심지인 경복궁을 복원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당파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서원과 특히 안동 김씨의 권력이 해체되었다.[4]
1873년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였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일족이 궁궐을 장악하고 요직에 임명되었다.[6] 궁궐과 정책이 왕비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5] 고종은 왕비 친척과 왕족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겨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먼 친척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는 일본 공작원들에 의해 시해되었다. (을미사변)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이 음모를 주도했으며, 일본에 호의적인 한국군이 경비하던 경복궁에 일본 공작원들이 진입하여 궁궐에서 황후를 살해했다. 명성황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 했고, 시해 직전 친러시아 성향을 보였다.[16]
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했다.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은 한국 내에서 논란을 일으켜 한국 내 반일 감정을 고조시켰다. 고종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져 1896년 러시아-한국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를 동맹으로 삼고, 러시아 제국에 많은 사절을 파견했다.[6]
일부 유교 학자들과 농민들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60개가 넘는 의병을 조직했다. 이 의병들은 동학 농민 운동에 이어 다양한 한국 독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2. 4. 1. 개항과 개화 정책
1873년 (고종 10년) 조선에서는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에 의한 척신 정치가 시작되었다.[6] 1875년 (고종 12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1876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 양국간에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다.[7]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세계 정세에 발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고종은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여,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일본식 군제를 도입하여 교육받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행정기구 개혁에도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880년(고종 17년),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이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 황준셴이 쓴 외교서인 <조선책략>을 갖고 들어왔는데, 이 책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일본, 미국 3국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1882년 4월,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2. 4. 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882년 6월,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13개월 간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불만으로 임오군란이 발발하였다. 구식 군인들의 추대로 정계를 떠나있던 흥선대원군이 10년 만에 재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되었다.[9][10]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제물포 조약)1884년 12월 4일 김옥균과 박영효가 주축이 된 급진 개화파 등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12월 6일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갑신정변의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12]
2. 4. 3. 거문도 사건과 동학농민운동
1885년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려던 영국 군함 세 척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이들은 청나라의 중재로 1887년 철수하였다.[6] 1894년 4월, 동학농민운동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5월 31일 농민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조선 정부는 6월 1일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다. 6월 6일, 청나라 군대 1500명이 아산만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9년 전인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맺은 톈진조약에 따라, 이틀 후인 6월 8일, 일본 또한 인천항을 통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정부는 6월 11일 서둘러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청일 양국에 군대 철수를 요구하였다.[6]2. 4. 4. 갑오개혁과 청일전쟁
일본은 조선의 철수 요구를 무시하고 7월 23일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이어서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 중심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6] 이 개혁은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 제출로 시작되었으나,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갑오개혁을 통해 역사 이래 지속된 신분제도가 형식적으로 폐지되었다.[15] 7월 25일 일본은 청나라에 국교 단절을 통보하고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6]2. 4. 5.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 전쟁의 결과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辽东半岛)와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1895년 8월 25일, 친러 성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는데, 조선 내 러시아 세력 확장을 견제하던 일본은 친러시아적 성향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하고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주한일본공사의 지휘 아래 1895년 10월 8일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를 습격, 명성황후를 살해했다.(→을미사변)[5]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을 시행,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했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유생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났다.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종용과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던 중, 왕태자 척(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직후 고종은 을미 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지목, 이들과 법부대신 장박을 포함한 다섯 대신을 잡아 죽일 것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는 피살되었고 유길준, 장박,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사실상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였다.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과 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했으며,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에 추진토록 했다.
2. 5. 대한제국 성립
1897년 10월 13일, 고종은 새로 건설된 황궁우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6]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새로운 연호 광무를 선포하여 청나라에 대한 종주권이 끝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6] 같은 날, 순종을 황태자로 책봉했다.[21]

고종은 한국, 특히 군대의 근대화 필요성을 절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민영환은 군대 근대화를 담당할 러시아 교관들을 초빙했고, 고종은 그들의 업무에 만족했다. 1898년 3월 러시아 교관들이 떠나자 군무부가 업무를 인계하도록 명령했으며, 군무부 장관 이종건의 요청에 따라 1898년 4월 군사학교가 설립되었다.[29] 1898년 6월 29일, 고종은 육군과 해군을 모두 지휘하기 위해 자신을 대한제국군 대원수로, 황태자를 원수로 임명했다.[30]
1898년 7월 2일, 고종은 군대에 대한 전권을 장악했고,[29] 1899년 8월 1일에는 원수부를 설립하여,[31]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32] 1899년에는 여러 나라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많은 사관생도들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파견했으며, 군대를 계속 확장해 나갔다. 1900년 7월까지 진위대 병력은 1만 7천 명에 달했고, 1901년에는 제국 총 수입의 약 44%가 군사비로 사용되었다.[29]
고종은 여러 차례 암살 또는 퇴위 시도를 당했다. 1898년 7월, 육군대신 안경수가 고종의 퇴위를 시도했고,[6] 1900년 5월 28일 음모죄로 처형되었다.[26] 1898년 9월 12일, 김홍륙이 고종의 커피에 독을 타서 암살하려 했다.[27] 1904년에는 일본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이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황제로 세우려 했다.[28]
2. 5. 1. 광무개혁
1897년 10월 13일, 고종은 황궁우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6] 연호는 광무(光武)로 정했다.[20] 이는 청나라에 대한 종주권이 끝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6]1899년 8월 17일, 고종은 대한국 국제|대한국 국제한국어를 공포하여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24] 그러나 입헌군주제 수립 가능성도 고려하였다. 개혁파인 독립협회와 개화당이 제안한 제안들을 논의했지만,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는 불충분해 보였고, 이로 인해 그들은 분노했다. 보수 정치인들이 퍼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협회가 제국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자,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25]
2. 5. 2. 고종 암살 미수 사건과 이준용의 쿠데타 기도
1899년 고종의 조카 이준용은 직접 쿠데타를 기획하였다. 이전까지의 쿠데타가 동학 농민군이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것과 달리, 이준용은 자신이 직접 쿠데타를 기획하고 사전 준비까지 하였다. 그 해에는 이준용 추대 관련 역모가 3건이나 적발되었다.[74]이준용이 일본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할 무렵, 장윤상 발언 사건과 어용선 사건은 고종을 크게 자극했다.[74] 전 참봉 장윤상은 자신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셨다고 하면서, 1899년 1월 이준용이 귀국하면 고종 대신 국왕이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74] 이 말은 와전되어 "박영효가 반역하여 이준용을 추대하고 고종을 태상왕으로 만들 것"이라는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4월 12일 소문의 발원자인 장윤상은 교형에 처해졌고, 그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유학 신현표와 전 순검 이지현은 태 100대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74]
또한 3월에는 어용선 등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셔다가 현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공화정을 표방해 대통령제를 실시하려 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82][75]
반정부 인사들이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나 움직임은 고종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장윤상 사건과 어용선 사건이 처리된 직후인 1899년 6월,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을 옹립하려 했다는 고발에 따라 윤태영 등 3인이 체포되었다.[82][76] 이는 고종 정부가 이준용 추대 모의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00년 안경수, 권형진을 처형 직전 심문하는 과정에서, 1894년 7월에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러한 역모 사건이 결국 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왔다.[77] 이에 고종 정부의 고관들인 김성근, 신기선, 조병식, 윤용선, 민종묵 등과 재야의 유생들은 1900년 6월부터 역모를 자행한 이준용을 일본에서 불러다가 처형하자는 상소를 반복해서 올렸다.[78] 그러나 고종은 그때마다 윤허하지 않았다.
6월 3일 궁내부협판 겸 대신서리 윤정구의 탄핵이 있자, 고종은 칙령을 내려 이준용의 궁내부 특진 관직을 박탈했다. 그러자 평리원과 학부에서 외부에 조회하여 1900년 6월 19일에 주일본공사 이하영에게 이준용을 즉각 잡아오라고 하였다.[78] 그러나 이준용은 귀국을 거절했다. 6월 20일 이하영은 "이준용이 꼼짝하지 않고 듣지 않으니 잡아 돌려보낼 길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78][79][80]
2. 6. 재위 후반
1882년 6월,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13개월 간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불만으로 임오군란이 발발하였다. 이 군란을 초래한 원흉으로 민씨 척족과 명성황후가 지목되었고, 구식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색출하려 했으나 명성황후는 이미 장호원으로 피신한 뒤였다.

구식 군인들의 추대로 정계를 떠나있던 흥선대원군이 10년 만에 재집권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된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복권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고문관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는데, 마젠창과 위안스카이,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이 파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의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제물포 조약) 또한 청나라와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권과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2. 6. 1. 러일전쟁과 국권 침탈
1900년 9월 27일 육군 참위 김규복, 노백린, 어담 등 19명에게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83]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한국의 황성(한양, 지금의 대한민국 서울)을 침탈할 것으로 예상하고, 1903년 8월 15일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58]1904년 1월 23일 고종은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2. 6. 2. 을사 늑약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고종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1월 15일 다시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84] 이 무렵, 주(駐)조선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 조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통감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통감은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통감과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종은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고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통감은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 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고종에게 강요 및 협박을 했다.
고종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통감을 달래어 내보냈다. 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 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85]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통감은 각료 8대신 가운데 5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86]
2. 6. 3. 헤이그 특사 파견과 강제 퇴위
1907년 4월,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와 호머 헐버트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하였다.[34] 이 사건을 두고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할 것을 강요하였다. 7월 2일, 특사 파견 정보가 당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귀에 들어갔고, 이토는 이를 빌미로 고종에게 압력을 가했다.[34]7월 16일, 친일 내각은 고종에게 을사조약에 서명하고 일본 천황에게 사과하며, 퇴위할 것을 요구했으나 고종은 거부했다.[34] 7월 18일, 이완용의 집에서 열린 내각 회의에서 황제 퇴위가 논의되었고,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을 받은 친일 단체 일진회가 경운궁 주변을 에워쌌다.[34] 회의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이완용 등은 고종을 압박하며 심지어 칼로 위협하기도 했다.[34]
결국 고종은 1907년 7월 19일,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포했다. 다음 날인 7월 20일, 고종과 순종 모두 참석하지 않은 채 퇴위식이 거행되었다.[34] 이는 왕이 즉위하지 않고 간소하게 치르는 의례인 권정례(權停例)에 따른 것이었다.[34]
일본은 군사력 박탈을 핵심 요소로 보았다. 이병무는 군대 해산을 실행했고, 4일 후 1907년 한일협약이 발표되어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되었다.[34]
2. 7. 퇴위 이후
1907년(융희 원년) 7월 24일,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요하였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다. (대한제국 군대해산) 정미7조약 체결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정미의병)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였고,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 머물게 되었다.
1912년, 임병찬 등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왕정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2. 8. 최후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68세로 사망했다.[38] 공식적인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였으나,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종의 묘소는 홍릉이며,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묘는 조선왕릉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39]
2. 8. 1. 고종 독살설
고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91]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91] 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으나,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입장을 바꾸게 된다. 윤치호와 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 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30센티미터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 고종 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고 했다.[91]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 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하였다.[91]
한편,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인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에 의하면, 고종이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수뇌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1919년에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합병의 부당함을 호소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이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고종으로 하여금 1905년의 을사늑약이 유효했음을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절하여 독살하였다는 일본 정계의 풍문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또한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와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와 같은 관료들에게 고종 독살에 대한 풍문을 묻기도 하였다.[92]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덕수궁에서 66세의 나이로 갑자기 서거하였다.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당시 제기되었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38] 이러한 주장은 고종의 서거 직후 처음 등장하여 널리 퍼져나갔다.[38] 그의 죽음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한국의 독립을 위한 3·1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38]
3. 가족 관계
아버지 | 헌의대원왕 이하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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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순목대원비 민씨 |
법부 | 문조 익황제 이영 |
법모 | 신정익황후 조씨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 |
후궁 | 황귀비 엄씨 |
후궁 | 영보당 귀인 이씨 |
후궁 | 귀인 장씨 |
후궁 | 내안당 귀인 이씨 |
후궁 | 보현당 귀인 정씨 |
후궁 | 복녕당 귀인 양씨 |
후궁 | 광화당 귀인 이씨 |
상궁 | 삼축당 김씨 |
상궁 | 정화당 김씨 |
작호 | 이름 | 출생 | 사망 | 생모 | 배우자 | 기타 | |
---|---|---|---|---|---|---|---|
1 | 완친왕 완화군 | 선 墡 | 1868년 5월 31일 | 1880년 1월 12일 | 영보당 귀인 이씨 | ||
2 | 원자 元子 | 최 | 1871년 11월 4일 | 1871년 11월 8일 | 명성태황후 민씨 | 쇄항증으로 사망 | |
3 | ![]() | 척 坧 | 1874년 3월 25일 | 1926년 4월 25일 | 명성태황후 민씨 | 순명효황후 민씨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
![]() | |||||||
순종 효황제 | 순정효황후 윤씨 | ||||||
4 | ▨▨대군 ▨▨大君 | 표 | 1875년 4월 5일 | 1875년 4월 18일 | 명성태황후 민씨 | ||
5 | ![]() | 강 堈 |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 | 귀인 장씨 | ![]() | rowspan="2" | |
의친왕 의화군 | 의친왕비 김씨 | ||||||
6 | ▨▨대군 ▨▨大君 | 부 | 1878년 2월 18일 | 1878년 6월 5일 | 명성태황후 민씨 | ||
7 | ![]() | 은 垠 |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 황귀비 엄씨 | ![]()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
의민황태자 영친왕 | 의민황태자비 | ||||||
8 | ![]() | 육 堉 | 1914년 7월 3일 | 1916년 1월 22일[102] | 광화당 귀인 이씨 | rowspan="2" | | rowspan="2" | |
▨▨군 | |||||||
9 | ![]() | 우 堣 | 1915년 8월 20일 | 1916년 7월 25일[103] | 보현당 귀인 정씨 | rowspan="2" | | rowspan="2" | |
▨▨군 |
작호 | 이름 | 출생 | 사망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
1 | ▨▨옹주 | 1871년 | 1872년 | 영보당 귀인 이씨 | |||
2 | ▨▨공주 | 1873년 2월 3일 | 1873년 9월 28일[104] | 명성태황후 민씨 | |||
3 | ▨▨옹주 | 미상 | 미상 | 내안당 귀인 이씨 | |||
4 | ![]() | 덕혜 德惠 |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 | 복녕당 귀인 양씨 | rowspan="2" | | |
덕혜옹주 | 소 다케유키 |
이문용(李文鎔)은 스스로를 고종과 상궁 염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라고 주장한 인물이나, 검증된 바가 없고 관련 기록도 없다. 소설가 유주현이 이문용을 고종의 딸로 묘사한 장편소설 《황녀》를 발표하고, 1974년 같은 제목의 MBC 일일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황녀 여부에 대한 진위 논란이 있었다. 드라마 때문에 황녀로 알려지자 1975년부터 전주 경기전 내 조경묘 수직사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3월 28일에 사망하였다. 황실 구성원들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왕실 족보 《선원계보기략》과 《승정원일기》에서조차 기록이 없는 이문용을 고종의 친딸이 아니라고 부정하였고, 당시까지 생존하여 있던 상궁도 이문용의 존재를 부정하였다.[105]
4. 평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근대화를 시도했다.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으며, 청나라와 대등한 조약을 맺고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는 등 외교적 노력도 기울였다.[72] 울릉도와 독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간도에 관리사를 파견하여 영토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73] 또한, 지계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하려 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를 탄압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은 외세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일본 황실에 편입된 점,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114][115]
4. 1. 긍정적인 평가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외국인들은 대체로 고종의 해박한 지식과 과감한 정치 감각에 호의를 보였다.[106]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극심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58]
스워터트는 미국인 데니(O. Denny)가 남긴 평가, 즉 “고종은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 낙관 및 인내를 보였다.”라는 평가를 지지하였다.[107] 데니는 이홍장이 조선을 속방화하려는 정책을 도울 것으로 기대하며 조선 정부에 추천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종의 고문이 된 데니는 조선을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고종의 노력에 감동하여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을 변호하는 일을 하였다. 헐버트(Homer Hulbert)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황제가 “유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면서 고종이 주권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 아래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던 것들을 열거하였다.[58]
기쿠치 겐조(菊池謙讓)는 《근대조선사》에서 고종이 암군이 아닌 명군이었으며, 단지 열강에 포위되어 내정보다는 외교에 힘쓰다가 국세를 끝내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묘사하였다.[58]
《코리언 레퍼지터리》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는 고종의 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 한문과 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 국왕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평가하였다.[108]
4. 2. 부정적인 평가
윤치호는 사람들이 황제를 "너무나 증오해서 그를 망신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하는 것 같다. 그가 왕좌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사람들의 혐오감이나 정의감을 만족시킬 것 같다."고 보았다.[112]미국의 개신교회 선교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은 1903년 10월 14일자 일기에서 고종을 "유약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885년 2월 3일자 일기에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조치"라고 평가하거나, 1886년 9월 11일자 일기에서는 "국왕은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다."라고 평가하는 등 다른 평가도 있었다.[58]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고종이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하며, 성실하고 유능한 군주이지만 너무 착한 사람이다. 그에게 강인한 성격이 있었다면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13] 이러한 평가는 일본에서 고종이 암울하고 유약한 군주였다는 "고종 암약설"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4. 2. 1. 정치적 능력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했다.[109] 미국의 언론인 데넷 타일러(Dennett Tyler)는 “대한제국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루스벨트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에 의해 배신당했다.”라고 극언했다.[58] 윤치호는 고종을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공인으로서는 신망을 얻지 못한 점에서 영국의 찰스 1세와 유사하다.'고 평가했다.[110]권력의 부패는 민중의 저항을 야기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는 죽을 위기를 넘겨 장호원으로 피신했고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때문에 권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된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 상황을 타개할 묘안을 찾아야 했고, 명성황후는 은밀한 서한을 고종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청나라 군대의 파병 요청이었다.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국내의 권력 다툼을 해결하고자 했던 장본인이 바로 고종과 명성황후였고, 그 뒤 외세가 툭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우리를 협박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4. 2. 2. 독립운동 불참과 일본 황적 편입 비판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단행되었으나 그는 일본에 적극 저항하지 않았고, 망국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일 병합 뒤에는 일본 황실의 황적에 편입 즉, 이왕가를 창설하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일본으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직책과 일본 제국 메이지 천황이 주는 은사금까지 수령했다.4. 2. 3.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고 비판했다.[114]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원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며 팔도강산에 두루 다니며 제사를 지냈다. 황현은 저서 매천야록에서 이때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의 재산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고 적었다.[114] 황현에 따르면 고종은 매관매직을 하거나 원납전을 거두어 내탕금이라는 개인 비자금을 만들었다.[115]다만, 황현의 매천야록은 저잣거리의 풍문 등 근거가 확실치 않은 내용도 기록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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